일시:2008년 1월 6일 당일산행
총거리:웅석봉-진부령(785km)
걸어온 길:웅석봉-화령재(282.95km)
남은거리:화령재-진부령(502.05km)
도상거리:약18.3km
실거리:약19km
날씨:흐림
개인 등반시간:6시간(점심시간포함)
고도표:
지형도:
무자년 첫 정기산행 해가바뀌어 만난 산우들이 악수로 반갑게 인사를 건낸다.
오늘이 소한이라 혹여 이름 값 한다고 강추위가 몰려오지 않을까 염려 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흐리긴 하지만 온화한 느낌마져 든다.
7:55
개머리재에서 포도밭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산행이 시작된다.
모동,모서,화동,화남,화서,화북으로 이어지는 중화지구는 야산과 농로,임도가 많고 마을에서 주변 농지나 마을로 연결되는 샛길이 많아서 고도는 낮지만 독도에는 신경을 써야만 한다.
8:36
손바닥보다 큼직한 떡갈나무 잎이 나뒹구는 야산길을 지나 지기재에 이른다.
상주-모서간 지방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엔 금강과 낙동강 수계 분수령을 표시하는 표말이 서 있었고, 주변엔 과수원이 많이 눈에띤다.
백두대간 분수령으로선 낮은지대지만, 농지로서는 꽤 높은 편이다.
평지와 기온차가 3~5도 정도 차이가 나며 주변에 높은산이 없고 일조량이 많아서 과일의 당도가 높으므로 포도, 감, 사과 같은 과수농업이 발달하였다.
지기재에서 신의터재 까지 는 해발 400정도의 작은 산을 하나 넘긴 하지만 나무꾼이 나뭇짐을 지고 나타날 것 같은 마을주변의 완만한 야산구간이다.
크고작은 무덤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깔끔하게 잘 관리 된 무덤도 있지만, 무너져 내린 봉분에 커다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덤에선 세월의 무상함을 엿볼 수 있었다.
9:44
상주-화동을 연결하는 지방도가 지나는 한적한 고갯마루에 산우들이 점령하여 사진을 찍고 간식을 먹는 등 분주하다.
도로옆 잔듸밭 중앙에 신의터재 표지석이있고 우측으로 비석이 서 있는데 비석의 사연은 임진왜란 당시(1592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침입한 왜적들은 15일 동래성, 19일 언양, 22일 영천을 지나는 동안 별다른 저항도 없이 북진을 계속 한다.
나라의 앞날이 풍전등화 같이 위태할 때 이곳 화동면 출신 김준신(金俊臣)이 의병 600여명을 모아 관군 60여명과 힘을 합쳐 상주성에서 왜적 1만 7000여명과 장렬히싸우다 32살의 꽃다운 나이에 거룩한 꽃잎을 떨구고 말았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사실상 내륙에선 처음으로 전투다운 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왜군도 승리는 하였지만 수백명이 죽고 다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분풀이를 하기 위해 김준신의 고향 화동면 판곡리에 들이닥친 침략군은 마을을 송두리째 짓밟기에 이른다.
남자들은 보는데로 죽이고 여자들은 �기다가 마을에 있던 연못에 투신하였다.
연못의 이름은 낙화담(落花潭)이 되었으며 당시 1600여평에 이르던 연못은 현재 60 여평으로 축소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다만 연못 가운데 노송 한그루가 그날의 처절한 사연을 반추하고 있다.
신의터재의 원래 이름은 신은현(新恩峴)이었으나 김준신의 사후 신의터재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어산재로 바뀌는 수모를 당하고 1995년에야 신의터재란 이름을 되찾았다.
신의터재 에서 야트막한 언덕으로 진입한 분수령은 김준신의 고향 판곡리를 감싸안고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 듯 이어진다.
이름이 아름다운 무지개산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꺽이며 하산하는 구간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기도 하였다.
내리막 길에서 삽주의 꽃을 만났다.
뿌리는 창출,백출이라는 이름의 한약제로 쓰이며 어린새싹은 나물로 먹기도 하는데 별다른 맛의특징은 없고 씹는 느낌은 까칠까칠 하고
다소 억센느낌이 난다.
개화기 에도 꽃이 화려하지 않아서 눈길을 끌지 못하는 편인데 억세고 두꺼운 외모덕에 한겨울 에도 꿋꿋이 서 있지만, 고집스럽게 버티고있다가 약초꾼들의 표적이 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1:20
윤지미산을 약2km쯤 앞두고 일찌감치 점심 자리가 마련되었다.
무덤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라면도 끓이고 보온 도시락에 준비해 온 따끈한 국물에 반주도 곁들여 에너지를 보충 하였다.
아내가 준비해 준 아이스위스키는 인기 상종가 였는데 양이 부족하여 다같이 나눠먹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12:50
에너지를 충전하고 가뿐히 윤지미산 정상에 오르니 잎사귀가 떨어진 작은 나무에 알록달록한 시그널이 나뭇잎보다 더 많이 매달려 있었다.
주변의 돌들을 모아서 돌 무더기를 만들고 중앙에 자그마한 자연석에 윤지미산 이라고 적혀있었다.
정상에서 좌측10시 방향으로 제법 가파른 내리막 길이 아득히 내려다 보인다.
13:30
화령재가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때쯤 임도가 나오고 우측 계곡 아래 상주 ~당진간 신설 고속도로가 하얀 벨트처럼 펼쳐져 있다.
고속도로가 점점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하면서 쌩쌩 내달리는 차량들의 괭음은 거의 소음 수준이었다.
주변산에 서식하는 야생동물들 에겐 상당한 공포와 위협적인 구조물 이 생겨난 셈이다.
13:50
화령재 넓다란 광장중앙에 7m쯤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백두대간 표지석이 석공의 땀도 마르지 않은 채 우뚝 서 있었다.
덩치큰 새 표지석에 밀려난듯 광장 우측 귀퉁이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화령재 표지석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화령재 서쪽 신봉리에는 화령장 지구 전적비가 있다.
끝자리 숫자 3·8일에 장이 서는 화령장은 6 ·25전쟁때 붉은 피로 물들었던 전적지 였다.
1950년 7월 17일에서 25일 사이에 벌어졌던 이 전쟁은 국운을 건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전투였다고 기록하고있다.
보은-화령장-상주 / 괴산-화령장-상주로 이어지는 요충지 임을 알고있는 인민군은 제 15사단을 투입하여 괴산에서 보은구간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국군 제 1사단을 견제하면서 1개 연대를 증강 배치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화령을 점령하고 상주로 진격하려 했다.
다행스럽게 국군 제 17연대가 인민군 전령을 생포하여 적의 작전을 간파하고 화령 동쪽 상곡리와 갈령 동관리 에 매복하였다가 인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정신없이 남쪽으로 후퇴만 하던 국군은 이 전쟁의 승리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는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수세에 몰렸던 전쟁을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귀가길 엔 새로난 당진-상주간 고속도로를 타게 되엇는데 내리막 길에 따르릉~따르릉~ 자전거 노래가 뚜렸이 들리는 멜로디 구간을 통과 하였다.
진화하는 토목기술은 편리함과 안전을 넘어 예술과 감성을 조율 하기에 이르고 있다.
이번구간은 분수령 고도는 어느 구간보다 낮았지만 충절과 애국의 기상은 더없이 뜨겁고 높았던 고장을 지나왔다.
이제 마루금은 속리산권 심장부로 향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기대되고 다음산행이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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